클래식이야기

  • 2023-02-16

[리뷰] [연합뉴스] 새로운 과제 확인시켜준 에셴바흐와 KBS교향악단의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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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제 확인시켜준 에셴바흐와 KBS교향악단의 말러

 

음향적 밸런스 아쉬워…'말러다움' 부족했던 '부활' 교향곡

5악장에선 높은 밀도와 에너지 보여줘… 마지막의 열광적 찬가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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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독일의 거장으로 꼽히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이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15일 콘서트홀 무대에 올렸다.

 

90여 분에 달하는 길이에 무대 바깥에서 연주하는 '취주악' 편성까지 포함하면 호른과 트럼펫이 10대씩이나 사용되고 혼성 합창과 성악 솔로가 등장하는 거대한 교향곡이다. 이전에 비해 큰 규모의 관현악곡을 들을 기회가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부활'만큼 음향적 장관을 선사하는 작품은 흔치 않아서 큰 기대를 모은 공연이었다.

 

이날 에셴바흐의 해석은 템포 상으로는 다소 빠른 편이었고, 루바토(특정 부분에서 음을 늘여 변화를 주는 것)는 대체로 자제했다. 그러나 침잠하는 부분에서는 꽤 큰 폭으로 변화를 줘 단절의 효과를 줬다. 이러한 특징은 첫 악장에서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대체로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적인 특징은 관객들에게 흐릿하게만 전달됐는데,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응집력이 음향적 밸런스의 차원에서나 악상의 전달력 차원에서 대체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타악기군은 시종일관 날카롭고 공격적이었지만, 현악기군은 양감과 다이내믹, 선율적 조형력 등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내지 못해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한 인상이었다. 현악기가 충분히 밀도 있는 소리를 내주지 못하고 때로는 금관과 타악기군 등에 묻히다 보니 목관 등 다른 파트 또한 리듬이 선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호른과 트롬본 사이, 바이올린과 저음 현악기군 사이의 주고받음이 매끄럽지 못해 리듬이 엉키거나 틈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세부의 표현을 따라가느라 전체의 큰 흐름을 놓친 것일까.

 

말러 초기 교향곡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속음 위에서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거나, 악구를 이어받아 연주하는 솔로 악기들이 성급하게 조금씩 먼저 들어와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에셴바흐는 악단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반대로 악단은 결속력 있는 전체를 이루기보다는 밸런스가 흩어진 인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보다 디테일한 영역에서 악장들의 개성은 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장송행진곡'이라는 부제로 작곡됐던 1악장에서는 몇몇 악상들이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음에도 전체적으로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 여림과 강렬함의 대비가 충분히 부각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온화한 2악장은 다소 처지는 느낌이어서 가운데 부분의 역동적인 느낌이 반감됐다. 하지만 재현부의 실내악적인 부분은 훌륭하게 재현됐다. 3악장은 본래 '물고기에 설교하는 파두아의 성 안토니우스'라는 풍자적 가곡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활달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한 느낌이 나야 한다. 그러나 무궁동(無窮動.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빠른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는 기악곡)처럼 활기 있게 움직이면서도 순간순간 어긋나고 부딪히고 강력한 부딪힘을 재현하려면 먼저 악구의 구조와 리듬이 더욱 선명하고 일사불란하게 살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활기가 부족했다. 파트별로 협응이 잘 되지 못해 서로가 맞물리며 고조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4악장은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소망, 그러나 극복하기 어려운 불안을 절절하게 토로하는 악장이다. 드라마틱한 음색을 가진 메조소프라노 양송미는 이러한 탄원에 어울리는 가창을 들려줬지만, 오케스트라가 더 편안하게 받쳐주지 못한 탓에 더 깊이 있는 명상과 무게감 있는 고백에는 이르지 못했다. 일종의 간주곡처럼 흘러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5악장이 '부활'의 무게에 걸맞은 전개 과정을 보여줬다는 것은 이날 공연의 위안거리였다. 비록 잔 실수는 있었지만 피날레 악장에서는 무대 밖에서의 관악과 타악을 비롯한 모든 파트가 높은 밀도와 에너지 수준을 보여줬다. 피콜로와 하프를 비롯한 현악과 목관 사이의 협응, 종교적 엄숙함을 자아내는 트롬본과 튜바, 마지막의 열광적인 찬가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성악과 관현악 사이의 조화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합창단은 조금씩 먼저 들어오고 조금씩 먼저 악구를 끊으며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좀 더 점진적으로 에너지를 비축하며 더 큰 열광으로 나아가려던 에셴바흐의 의중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듯한 인상이 진하게 남았다. 그로 인해 소프라노 이명주와 메조소프라노 양송미 두 솔로의 마지막 이중창 또한 충분한 감정으로 표현되지 못했다.

 

그간 한국의 오케스트라들은 발전을 거듭해 기술적으로는 말러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하나의 과제를 확인시켜 줬다. 분명히 말러를 들었는데 그 음악에서 말러다운 그 무엇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좀 더 생각해야 할 문제다.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악단 전체의 컨디션이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음향을 넘어서서 말러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어떤 음악적 드라마의 과정을 들려주려 했는지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관객들은 연주를 통해 죽음과 자연과 세상사와 실존의 불안을 넘어 생명을 찬양하는 말러의 '고백'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760356?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