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11-27

[리뷰] 상트레닌스부르크, KBS교향악단 제722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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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상트레닌스부르크, KBS교향악단 제722회 정기연주회

 

 

 

[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에서 자라 레닌그라드에서 성년이 되었다. 그가 상트레닌스부르크라고 부르곤 하는 곳.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23p).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러시아의 두 작곡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이 예술과 혁명의 도시는 두 예술가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혼란스런 도시와 시대상을 대하는 두 작곡가의 대토는 서로 달랐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기록했다. 반면 프로코피예프는 눈을 돌려 도시를 박차고 나왔다.

 

이번 연주회에선 탄생 과정이 정반대인 두 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작패처럼 구성됐다. 요엘 리비와 니콜라이 루간스키 그리고 KBS교향악단은 과연 이 곡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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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엘 레비는 강렬한 리듬으로 신경질적인 음악을 선사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철저한 재현을 통한 재창조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모방”이라고 했다. ‘성격이나 정서 또는 행위’ 즉, 인간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 마음속에 맺힌 레닌그라드의 모습을 현실 세계에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재현의 매개체는 악보다.

 

레비가 평소 철저하게 악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건 어쩌면 작곡가의 심상을 온전히 연주로 재현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따라서 같은 악보를 통해서 다른 결과가 빚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온전히 재현하려는 시도 중에 빚어지는 다른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요엘 레비의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악보를 보며 살펴보자.

 

1악장 도입부 악보를 보자. 첫 마디 4개의 음표마다 악상기호가 표시돼 있다. 첫째와 셋째 음표의 기호는 내림 활로 연주하란 의미이며, 둘째와 넷째 음표의 기호는 반대로 올림 활로 연주하라는 자곡가의 지시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단지 첫 음표에서 내림활로 연주를 시작해 올림 활과 내림 활을 번갈아 사용하란 뜻이다. 하지만 활의 사용을 이만큼 세세하게 기록했다면 여기에 작곡가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악보를 살펴보면 이후에도 면밀하게 활의 사용을 지시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내림 활은 올림 활에 비해 강한 소리를 내기에 용이하다. 그렇다면 내림 활 기호가 붙어있는 음표들은 강하게 악센트를 넣어서 연주하는 게 쇼스타코비치의 의도일까

 

적어도 요엘 레비는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이곡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연주들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케겔/라이프치히 방송 교향악단(1972, WEITBLICK), 키릴 콘드라신/모스크바 필하모닉 심포니(1975, MELODIYA), 레너드 번스타인/시카고 심포니(1988, DG) 등의 연주와 비교했을 때 레비가 내림 활 부분을 훨씬 강한 악센트로 해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까지의 보편적인 해석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철저하게 악보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재창조를 이뤄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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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는 내림 활과 올림 활을 세세하게 구분했다

 

신경질적인 효과
강한 악센트로 노래하는 레비의 해석은 어떤 효과를 낳았을까 ▲첫째 신경질적인 러시아어 노래를 연상케 했다. 러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 2억 8500만 명이 사용하며 이 가운데 1억 6000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한다(Language Monthly No. 3, 1997 발행). 워낙 많은 인구가 사용하기에 민족 지역에 따라 억양에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강한 악센트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러시아어의 특징을 기악으로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레비의 해석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레비의 해석은 ▲둘째 강렬한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군이 레닌그라드를 공격했을 때 탄생했다. 따라서 144마디부터 등장하는 작은북의 리듬은 기관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과감한 리듬은 <레닌그라드 교향곡>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내림 활로 강한 악센트를 연주하는 레비의 해석은 1악장 3마디의 팀파니 연타처럼 타악기 및 관악기와 어우러져 신경질적인 리듬을 감을 이뤘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친군의 공격 속에서도 레닌그라드에서 이곡을 작곡했다. 어쩌면 떠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나치군이 도시를 포위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곡을 단지 전쟁이란 현실적 상황만을 노래하는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작곡가는 내면의 적을 상상하며 작곡했기 때문이다. 그 적은 체제일 수도 있으며, 시대일 수도 있다. 누군가일 수도 있으며 작곡가 자신일 수도 있다.

 

레비의 신경질적인 연주는 그럼에도 쇼스타코비치 내면의 처절함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레비의 해석은 악보를 중심으로 온전한 재현을 통한 보편성의 획득에 무게를 둔 까닭이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처절함이 희석된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의 해석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 시켰나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장대한 피날레를 연출했으며, 2017년 KBS교향악단의 연주 중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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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루간스키(왼쪽)와 요엘 레비(오른쪽)가 연주를 마치고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러시안의 감성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의 1악장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작곡했다.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2악장은 망명길의 미국에서 썼으며 3악장은 프랑스 파리에서 마쳤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도시에 머물며 탄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날 연주회에서 정말 대조적이었던 부분은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레비의 손에서 보편적 해석으로 재현된 반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작곡됐음에도 온전히 러시아인의 감성으로 해석됐다는 점이다.

 

루간스키(Nikolai Lugansky)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수학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보수적인 도시다. 지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북서쪽의 핀란드만에 위치했다. 핀란드와 인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이 도시를 가리켜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모스크바는 내륙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 모스크바가 가진 보수성은 루간스키로 하여금 빛나는 러시안 피아니즘의 소유자로 자리매김하는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루간스키는 레비와 마차가지로 악보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반면 루간스키는 프로코피예프 마음 내부의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러시아를 떠나 완성된 까닭에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미묘하게 배어있는 러시아의 정취를 러시안이 아닌 피아니스트가 구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루간스키의 러시안 피아니즘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흔히 러시아 음악에서 강렬함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이 러시아 음악의 전부는 아니다.

 

루간스키의 터치는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서 유기적으로 이뤄졌으며 맑고 서정적인 음색을 들려줬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특이한 울림이 많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론 온음계적 서정성을 견지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과도한 기교나 격정적인 표현은 작품의 본질과 거리가 있다. 어쩌면 1악장을 시작하는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독주가 이 작품의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루간스키의 연주는 철저하게 프로코피예프의 서정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불필요한 루바토는 지양하며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부드럽게 감싸는 왼손의 배음으로 영롱한 음색을 구사했다.

 

444444.jpg▲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온음계적 서정성을 견지하는 작품이다

 

두 가지 해석의 기조
프로코피예프처럼 혁명을 피해 사방세계에 정착하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이며, 쇼스타코비치처럼 그 자리에서 묵묵히 견디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이다. 서로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던 두 작곡가는 결국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이정표를 세웠다. 니콜라이 루간스키와 요엘 레비가 각각 선보인 해석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그린 러시아의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술과 혁명의 도시, 쇼스타코비치가 상트레닌스부르크라고 부르곤 했던 그 곳은 두 작곡가로 하여금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이정표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이날 KBS교향악단 연주는 어쩌면 새로운 이정표로서 자리할지도 모르겠다.

 

KBS교향악단 제722회 정기연주회
일시·장소: 9월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요엘 레비
협연: 니콜라이 루간스키
연주: KBS교향악단

 

프로그램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C장조 op. 26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op. 32 - 12번 G sharp단조 (피아노 앙코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07번 C장조 op. 60 “레닌그라드”



권고든 withinnews@gmail.com

 

원문출처: http://www.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148&category=149&page=3&no=13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