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11-27

[리뷰] 음악이냐 스토리냐, KBS교향악단 제721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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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음악이냐 스토리냐, KBS교향악단 제721회 정기연주회


[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이 말은 곧 음악은 ‘서사를 다루는 예술’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오페라나 발레, 표제음악(program music)처럼 이야기에 기반을 둔 음악은 물론 절대음악(absolute music) 조차도 서사 구조 아래 있다.

 

음악을 구조적인 면에서 바라보자. 작곡의 과정을 떠올려도 좋다. 먼저 음악의 씨앗이 되는 주제(보통은 선율)가 있다. 이 주제에 화성과 리듬이 더해지고 흐름에 따라 주제에 대응하는 대주제(對主題)가 등장하기도 하며 때론 변형(변주)되기도 한다. 이렇게 음악을 완성하는 과정은 문학에서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과정과 흡사하다. 즉, 문학의 서사 이론은 상당 부분 음악에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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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레비는 플롯을 비틀어 새로운 연주를 선사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플롯(plot)을 비틀다
요엘 레비는 프로코피예프의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 모음곡>의 플롯(plot)을 비틀어 음악적 긴장감을 성취했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음악은 그대로 셰익스피어가 구상한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 이뤄졌다.

 

이날 연주회 무대에 오른 음악은 발레를 위해 작곡된 원곡을 작곡가 스스로 발췌해 연주회용으로 만든 모음곡이다. 발레 원곡과는 순서나 구성이 다소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지휘자는 취향과 의도에 따라 발췌해 연주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날 레비의 선택은 독특하고 대담했다. 본래 이야기를 비틀어 새로운 플롯을 창조한 것이다.

 

스토리(story)와 플롯의 차이를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스토리는 ‘시간순서에 따라 배열된 사건의 서술’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든다면 두 주인공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갈등으로 두 주인공이 죽는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나열한 것이 스토리다. 반면 플롯은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 사건의 서술’이다. 즉,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순서를 비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결론을 먼저 보여줘 호기심을 일으킨 다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 등이 플롯이다.
-참조, 에드워드 포스터(E. M. Forster)의 『소설의 양상』

 

그렇다면 레비는 과연 어떻게 스토리를 비틀어 새로운 플롯을 창조했을까? 본래 셰익스피어가 구상한 스토리대로라면 마지막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도 크게 다르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소개하며 시작해 둘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레비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집안 즉, <몬태규 가와 캐퓰릿 가>(The Montagues and the Capulets)의 으르렁거림으로 시작했다. <모음곡 2번>의 첫 곡으로 시작했지만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다. 정말 특이한 부분은 결말이었다.

 

음악이냐 스토리냐
레비는 두 주인공의 죽음 대신 <티볼트의 죽음>(Tybalt’s Death)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렸다. 원작에서 티볼트는 줄리엣의 사촌으로 로미오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한다. 보다 못한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가 티볼트와 싸우다 죽고 로미오는 격분해 티볼트를 찔러 죽인다. 이 사건이 방아쇠가 결국 두 주인공의 죽음을 가져온다.

 

티볼트의 죽음이 두 주인공의 죽음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마지막에 연주하는 것은 극적이 효과를 낳았다. 마치 이야기를 마친 후 들려주는 강렬한 에필로그(epilogue)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용하게 마무리되는 본래의 스토리에 <티볼트의 죽음>이 가세해 극적인 결말을 이루는 한편 극도의 긴장이 일순간에 해소되는 카타르시스(katharsis)의 역할을 했다. 레비는 전체적으로 빠른 곡과 느린 곡을 번갈이 구성해 영화의 교차편집(cross cut)처럼 극렬한 대비를 성취했다.

 

레비의 이 같은 선택은 작품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 모음곡>을 음악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스토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른 것이란 의미다. 레비는 이 작품을 스토리보다는 음악적 관점으로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빠른 곡과 느린 곡을 교차해 연주한 것도 그런 이유다. 스토리나 플롯의 관점에서 본다면 레비의 구성은 시간순서나 인과관계의 연결고리가 약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본다면 대비를 통해 각각의 곡들이 가진 특징이 부각된다.

 

이날 연주의 극적인 구성이 플롯의 원리를 간파한 레비의 선택일 수도, 그저 음악적인 인과관계를 고려한 선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어떤 연주보다 피날레가 강렬했으며, 대범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낭만 걷어내고 산뜻함 입다
<풀치넬라 ? 모음곡>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페르골레시의 잊힌 기악곡과 오페라 음악을 스트라빈스키가 새롭게 탄생시킨 음악이다. 연주회 첫 무대를 <풀치넬라 ? 모음곡>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크적 요소를 연주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으로 설정한 레비의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에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 모음곡>에서 바로크적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치넬라 ? 모음곡>은 이후 연주의 프리뷰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레비는 이날 연주에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의 특징을 일정부분 수용한 면이 있었다. 현악의 비브라토를 다소 제한한 직선적인 음향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음악이 평면적으로 흐를 위험이 존재한다. 레비는 이런 위험요소를 관악 파트의 입체적인 울림으로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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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의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는 산뜻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차갑고 신경질적인 아름다움
제임스 에네스(James Ehnes)의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연주는 폭발적이라든지 뜨겁다는 표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대신 윤곽이 뚜렷한 음색을 바탕으로 차갑고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연주였다. 텍스트에서 읽어낸 심상을 무대 위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재현해내는 그의 연주는 냉철한 지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글라주노프 4중주단과 리허설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바이올린니스트 한 명이 “당신은 왜 아름다운 선율을 쓰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에 앉아 즉흥연주를 펼쳤다. 평소의 소스타코비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한 음악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런 음악을 쓸 기분이 아닙니다.”

 

앞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의 음악에서 기대하는 감미로운 선율은 쇼스타코비치가 추구하는 바는 아니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체제의 억압과 예술적 자유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그 안엔 체제의 억압에 대한 신랄한 독설, 생계를 위해 당국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작고하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 심리적 강박 등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이 작품의 작품 번호는 77번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는 99번이다. 소비에트 당국의 혹독한 검열 탓에 책상 서랍에서 7년 7개월 동안 잠들어 있던 것에서 착안해 작품 번호로 77번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음악을 감미롭게 연주한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해석이다. 차갑고 신경질적인 에네스의 연주는 통념적인 아름다운에선 비켜섰다고 볼 수 있지만 실은 본질에 근접한 해석이다.

 

건조하고 기괴한
에네스 특정 부분에서는 현대 바이올린 연주에선 당연시되는 비브라토(vibrato)를 쓰지 않고 연주했다. 비브라토는 악기의 소리를 떨리게 연주하는 기법인데 이렇게 연주하면 소리가 한층 풍성해진다. 다시 말해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않으면 소리가 건조하고 날카로워진다. 에네스는 이런 음색을 활용해 신경질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특히 3악장 후반부의 4분여에 달하는 카덴차(cadenza, 독주악기의 기교적인 부분)에서 극도의 신랄한 연주로 오히려 연민을 자아내기도 했다.

 

비브라토에 인색한 에네스의 연주는 3악장의 파사칼리아(passacaglia)와 같은 바로크적인 음악 요소들을 오히려 기괴하게 들리게 했다. 이렇듯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에네스의 냉철한 지성은 쇼스타코비치의 예민한 이지주의와 맞닿아 있었다.

 

에네스의 냉철한 음색은 24일 연주보다 25일 연주에서 한층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주홀의 차이 때문이다. 24일 연주회는 롯데콘서트홀에서, 25일 연주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진행됐다. 롯데콘서트홀의 경우 연질의 바닥이 연주자의 소리를 반사해 생생하고 따뜻하며 풍성한 소리를 이룬다. 반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비교적 경질의 사운드를 구사하는데 이번 연주에선 소리의 궁합이 예술의전당과 더 잘 맞았다.

 

레비가 이끄는 KBS교향악단 역시 낭만적인 표현을 자제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연주했다. 독주자를 비롯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기조 안에서 이룩한 연주로서 예민한 이지주의(理知主義), 음울한 멜랑콜리(melancholy), 연민을 자아내는 냉철함 등 우리가 쇼스타코비치에게 기대하는 심상(心象)을 모두 포함한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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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에네스는 냉ㅊㄹ한 연주로 쇼스타코비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사진: 에네스 페이스북)

 

KBS교향악단 제721회 정기연주회
일시·장소: 8월 24일 롯데콘서트홀,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요엘 레비
협연: 제임스 에네스
연주: KBS교향악단

 

프로그램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 모음곡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op. 77 (op. 99)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장조 BWV 1005 ? 3. 라르고 (바이올린 앙코르)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 모음곡 (발췌)
하차투리안: 가야네 ? 칼의 춤 (앙코르)



권고든 withinnews@gmail.com

 

원문 출처: http://www.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148&category=149&page=4&no=12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