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11-27

[리뷰] 오코 카무의 음악적 롱테이크, KBS교향악단 제720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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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코 카무의 음악적 롱테이크, KBS교향악단 제720회 정기연주회


[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오코 카무(Okko Kamu)가 이번 연주회를 위해 선택한 <닐센 교향곡 5번>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음악적 의지”라는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대부분의 관객은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이다. 작곡가의 시점과 관객의 시점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연 오코 카무는 이러한 시점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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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 카무의 음악적 롱테이크는 작곡가와 관객을 마주하게 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작곡가와 관객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
닐센 교향곡 5번은 1922년에 완성됐다. 그리고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온 유럽을 휩쓸었다. 닐센의 조국 덴마크는 비록 전쟁의 중심에선 거리가 있었지만 전쟁의 공포에서 비켜있었던 것은 아니다. 닐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향곡 5번에 전쟁에 대한 회상이 배어있는 것은 이러한 이 때문이다. 닐센 연구가 알려진 음악학자 로버트 심슨(Robert Simpson)은 교향곡 5번을 가리켜 “인간의 투쟁을 나타낸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교향곡 5번이 작곡된 지 약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가까이는 1950년 이 땅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졌지만 이 역시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한 것이 사실이다. 평자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작곡가가 전하려 했던 전쟁의 참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닐센 교향곡 5번은 일종의 표제음악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닐센은 작은북에 폭력의 근원이란 역할을 부여하고 반복적으로 평화와 폭력을 대비시키며 내러티브(narrative)를 진행한다. 구체적으로 음악을 살펴보자. 1악장 초반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주제를 기관총 소리를 연상시키는 작은북의 리듬이 깨뜨리며, 작은북의 리듬이 절정에 이를 때 바이올린은 “잃어버린 영혼의 숨죽인 울음소리” 주제를 연주한다.

 

내러티브는 간단히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래서 평자는 내러티브를 다루는 예술인 문학과 영화의 개념 중 일부를 차용하고자 한다. 특히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란 점에서 음악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디제시스(diegesis)란 개념이 있다. 내러티브 즉, 이야기 안에서 묘사된 허구의 세계를 가리킨다. 흔히 ‘창조적 허구’라고 표현되는데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모든 것이 디제시스를 형성한다. 따라서 디제시스적 시간이란 말은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칭되는 비디제시스적 시간은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시간 즉 이야기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가리킨다(영화에선 주로 상영시간을 말한다). 이날 연주회에서 디제시스적 시간은 제1차 세계대전이 펼쳐진 1914~1918년의 세계이며, 비디제시스적 시간은 관객들이 머물러있는 2017년 7월 21일이다.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의 벽이 작곡가와 관객들 사이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연주자는 이 벽을 넘어 작곡가가 느낀 바를 관객에게 전해야 한다. 결국 해석은 이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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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센은 정확한 템포로 연주할 것(tempo giusto)을 요구한다

 

자연스런 내러티브를 위한 음악적 롱테이크
영화에서 관객들을 영화 속 내러티브를 실감나게 느끼게 하기 위해 특정 장면을 편집 없이 길게 촬영하는 롱테이크(Long-take) 기법을 사용한다. 디제시스적 시간과 비디제시스적 시간의 간극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오코 카무는 이번 연주회에서 닐센 교향곡 5번의 내러티브를 관객들이 가깝게 느끼도록 음악적 롱테이크를 사용했다.

 

바로 긴 프레이즈다. 오코 카무는 될 수 있는 한 음악의 진행을 끊지 않고 긴 호흡으로 연주했다. 근래의 젊은 지휘자들은 짧은 호흡으로 간결한 해석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전체적으로 연주는 깔끔한 인상을 띈다. 반면 음악적 몰입감은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반면 오코 카무의 연주는 긴 호흡으로 관객이 음악의 이야기에서 벗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나뭇잎이 아니라 숲을 보는 넓은 시각의 연주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오코 카무는 닐센의 처절한 이야기를 무표정하게 시작했다. 도입부 비올라의 16분 음표들과 목관악기의 화음들은 전쟁 전의 평화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지휘자들은 곧 등장할 전쟁의 전조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비올라의 음형이 그런 인상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악보를 살펴보자.

 

비올라 파트의 첫 마디에 작곡가는 ‘템포 주스토’(tempo giusto)라고 써 넣었다.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란 말이다. 이는 어쩌면 지휘자들이 교향곡 5번을 표제음악으로 바라보고 묘사에 치우치는 우를 범하는 걸 방지하려는 작곡가의 당부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많은 지휘자들이 평화의 주제, 전쟁의 주제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다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는 경우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코 카무의 무표정한 연주는 음악의 흐름이란 측면에서도 얻는 게 많은 선택이다. 교향곡 5번은 2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연주시간도 35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음악 안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감은 대작 못지않기 때문이다. 앞서 근래의 젊은 지휘자들이 간결한 프레이징을 선호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들이 짧은 프레이징을 선호하는 것은 음악을 가볍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가벼운 이야기에 발을 들이는 건 힘도 덜 드는 일이다. 부담이 적고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 반면 무거운 이야기는 듣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닐센의 묵직한 주제의식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만약 시작부터 갖가지 기교로 묵직하게 연주했다면 닐센의 이야기에 관객들이 쉽게 몸을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건조한 음악적 롱테이크는 닐센 교향곡 5번을 현란한 극영화가 아니라 한편의 묵직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음악적 기교를 최소화한 오코 카무의 연주는 닐센의 순수한 목소리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덕분에 관객들은 닐센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건조한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피날레에선 닐센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앞서 평자는 지휘자에게 해석은 작곡가와 관객들 사이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오코 카무는 자신의 해석을 최소화함으로 닐센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는 선택을 했다. 아마도 오코 카무가 핀란드 출신으로서 닐센과 함께 북유럽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시벨리우스와 그리그의 음악어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해석일 것이다.    

 

물론 연주에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오케스트라의 안쪽 소리라 할 수 있는 목관 파트의 음향적 밸런스가 다소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지휘자가 이끄는 큰 흐름 속에서 세부가 다소 뭉툭하단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날의 연주는 근래의 KBS교향악단의 무대 중 단연 돋보이는 모습이었음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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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 제니에는 아기자기한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KBS교향악단)

 

아기자기한 기교, 아쉬운 미스 터치
연주회 1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마치 닐센 교향곡 5번의 프롤로그(prologue)처럼 느껴진다. 전쟁이란 같은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때론 우아한 이 곡에서 전쟁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1809년 빈이 나폴레옹의 군대에 함락된 상황 속에서 이 곡을 썼다는 점을 생각한다. 더욱이 당시 베토벤은 귓병이 악화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포탄 소리에 귀가 상하지 않도록 베게로 귀를 막고 전쟁을 버텼다. 즉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비인간적인 거대한 폭력에 맞서 인간적인 존엄성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베토벤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닐센의 작품보다도 100년 전에 쓰였다. 하지만 작곡가와 관객사이의 벽은 훨씬 낮다. 고전으로서 많이 알려진 곡인 까닭이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닫양한 해석으로 곡이 가진 이면의 매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날 협연자로 무대에 오른 레미 제니에(Remi Geniet)는 아기자기한 기교를 앞세워 작품의 우아한 매력을 끌어내는 해석을 선보였다. 이러한 천진난만한 제니에의 피아니즘은 전쟁의 참상이란 베토벤의 내러티브와 맞물려 신선한 매력을 전했다.

 

제니에는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음색을 지녔다. 그의 음색은 건반에서 손을 떼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듯하다. 피아노는 건반악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해머가 현을 내리치는 타악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둔탁한 터치는 현의 떨림을 방해하고 음색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그런데 제니에는 건반을 내린 친 후에 손을 떼는 타이밍이 적절해 깨끗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오코 카무와 KBS교향악단의 반주는 제니에의 피아니즘을 적절히 뒷받침 했다. 오코 카무는 다수의 현악기의 포진시켰다. 그렇다고 큰 음량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두터운 현을 기초로 쌓고 그 위에 제니에의 가벼운 소리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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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악장에서의 미스 터치는 치명적이었다

 

 

제니에의 피아노 연주는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음에도 큰 아쉬움을 남겼다. 바로 미스 터치 때문이다. 미스 터치가 전혀 없는 연주는 흔치 않다. 박보를 빼곡히 채운 음표를 빠르게 연주하다보면 미스 터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큰 흐름에 묻혀 표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느린 악장에서의 실수는 치명적이다. 2악장 16마디 오케스트라의 서주에 이어 피아노가 약음으로 선율을 이어받는 부분이다.

 

여기서 오른손 첫 터치가 (Appogiatura 앞꾸밈음)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제니에는 오른손 본음에서 음정을 잘못 연주했다. 거기다 피아니시모(pp, 아주 여리게)임에도 불구하고 세게 연주했다. 제니에의 터치를 보면 기본기가 탄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살펴본 연주에선 안정된 모습이었다. 이날 제니에의 컨디션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긴 여행은 오늘날의 연주자에겐 필수다. 특히 피아니스트는 몇몇을 제외하곤 낯선 홀에서 낯선 악기와 마주해야 하는 게 숙명이다. 따라서 컨디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실력의 일부가 됐다. 이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KBS교향악단 제720회 정기연주회
일시·장소: 7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오코 카무
협연: 레미 제니에
연주: KBS교향악단

 

프로그램
닐센: “알라딘” 모음곡 중 ‘오리엔탈 행진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 flat장조 op. 73 “황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번 A장조 op. 2-2 중 3악장 (피아노 앙코르)
닐센: 교향곡 5번 op. 50



권고든 withinnews@gmail.com 


 

원문출처: http://www.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148&category=149&page=5&no=12566